3
‘괜찮아?’
나는 어디선가 울리는 목소리에 깨어났다. 처음엔 그것이 꿈 속의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게 나에게 들려오고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걷고 처음 마주한 광경은 매일 아침 바라보는 똑같은 천장.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집에 갑자기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가 벽 쪽에서 들려온다는 걸 어렵지 안게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그 소리에선 어떠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도우려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옆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 해본적도 없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 낮이 익다. 나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입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에 대답하고자 힘을 써보았지만, 여전히 몸은 딱딱하게 굳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 소리는 점차 희미 해졌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상하리 만치 움직여지지 않았던 나의 몸은 다시금 움직여졌고, 얼마전부터 나에게 끊임없이 느껴졌던 창밖의 무거운 시선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태양을 가린 거대한 안구가 사라진 것일까? 나는 묘한 기대감과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떠있는 검은 구체. 여전히 검은 하늘엔 비현실적인 안구가 한 층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사뭇 달랐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나에게 계속해서 속삭이는 것처럼, 난 느낄 수 있었다.
‘저 곳으로 가야 해.’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걸음, 세걸음 거침없이 내딛고 어느새 방문 앞에 도착했다.
굳게 잠긴 현관문, 난 그것을 열었다.
밖으로 나간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매일 있는 일이며 또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동이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예전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수십번도 번뇌를 반복했던 문 앞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문 앞에서 망설였던가. 내가 할 수 있을까? 괜찮을까?
수많은 고민들에 잡아 먹히던 지난 시간들이 울긋불긋 솟아오른다. 하지만 번잡한 내 마음과 다르게 나의 몸은 마치 그 날의 사건을 까먹은 듯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은 힘없이 흘러내리며 바깥의 세상을 열어주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내가 나갈 수 있을까? 내 머리와 몸은 계속해서 그 판단을 달리했다.
어쩌면 나도 잘 알고 있다. 바깥 세상에서 그때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은 순전히 우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간다고 바로 죽음의 기로에 놓인다 거나, 내가 환상속에서 바라보는 나와 똑같이 생긴 ‘그것’ 과 같은 죽음을 맞이할 확률은 희미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웠다. 그럴 수 없다 와 그러기 힘들다- 그 차이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차이였기에. 바깥의 공기는 차갑게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고, 아직 보지 못한 바깥의 풍경에는 무엇이 펼쳐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복도, 혹은 나와 똑같이 생긴 그것의 새로운 죽음, 또는 죽은 형의 잔상이 나에게 아른거리겠지. 하지만 바깥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뒤부턴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진듯 떨리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감은 눈을 뜨고 창을 벗겨낸 바깥의 세상을 뚜렷이 응시했다. 묘하게 어떠한 떨림이나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공포스러운 환상에게서 이제서야 벗어난 걸까? 아니면 이 또한 거짓된 현실일까? 나는 나의 의지로 두발을 딛고 안과 밖으로 나눠진 틈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문 앞의 복도는 어딘가 어색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진 밖과 안의 세상은 희미한 기억 너머에 사라져버린 듯 일렁거린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나는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나를 부르던 옆 집 사람은 누구일까? 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지만 내가 들었던 그 목소리는 적어도 나에게 어떠한 악의도 내비치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였기에 그런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소리가 들렸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을 바라본 순간, 그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애초부터 우리집에 이웃은 없었다.
x월 5일
몇 주 전 부모님과 난, 상의 후에 이사를 갔다. 끔찍한 기억이 새겨진 이 지역을 벗어난 다면 더 이상 악몽이 떠오르지 않겠지? 하는 기대감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가는 차안에선 한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금 나를 괴롭혀 왔다. 달리는 차에서 바라본 창 너머에선 수많은 ‘나 자신’. 그들은 하나 같이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을 감고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도하는 것 뿐. 회피하는 것은 분명 어떠한 해결책도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나에겐 아무런 생각 없이 눈을 감고 눈앞의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더욱 편하다.
그렇게 간신히 도착한 집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가정주택이었다. 나를 걱정한 것인지, 우리 가족을 제외한 어떠한 타인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외진 곳이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 속에서도 내 방은 예전처럼 텅 비어 있다. 밖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가 이사를 한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똑같은 방이 새로운 세상 속에서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밖에선 여느때와 같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꽤나 큰 소리를 주고 받으며 무언가 이야기하고 계셨는데, 대충 내 방에 위험한 물건을 방치한 이유에서 였다. 내 방이 어제와 똑같이 텅 비어있는 이유는 부모님은 저런 배려 덕분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밖의 세상과 나를 단절하던 창문의 나무 판자가 치워졌다는 것이다. 그곳을 바라보면 적어도 내가 악몽이 가득한 그곳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창에서 다시금 이상한 모습이 비추기 시작했다.
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형이 다시금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형의 일그러진 얼굴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눈 하나 깜박거릴 수 없었다. 그을린 피부위로 흰색 빛을 띄며 반짝거리는 두 눈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동시에 두려워 보였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그의 눈동자 같이.
그렇게 몇 분을 그와 대면하며 굳어 있었을까? 이 숨막히는 눈맞춤은 때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온 부모님의 시끄러운 소음에 깨어졌다. 다행히 부모님이 나를 부르는 그 순간 굳은 몸은 다시금 움직여졌고, 나는 소름 돋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서 내 눈을 멀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문득 이렇게 두 눈을 마주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는 꽤나 정겹고, 슬펐다.
“같이 너가 좋아하던 밴드 공연을 보러 밖에 나가 보는 것 어때? “ 부모님은 장황하게 같이 나가면 좋을 이유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시기 시작했다.
우리가 항상 너의 옆에 있을께. 우리가 지켜줄께. 모두 다 괜찮아.
별 마음 없이 툭툭 내뱉을 수 도 있을 가벼운 말들, 하지만 왜 인지 그 몽글거리는 말들이 너무나도 편안했다.
수많은 고민속에서 얻은 해답들보다 나 자신보다는 나를 모르는, 어찌 보면 상대적인 타인들이 내 뱉은 간단하고 쉬운 한마디에서 용기가 생겨 났다.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주지 못했지만 그저 무언가 자글자글한 솜뭉치가 마음속에 얽히는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확실해. 나에겐 아직 소중한 것들이 남아 있어.
나에겐 아직 살아갈 이유가 남아있었다. 나를 이곳에서 일으켜줄 누군가가 이 세상에 남아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밖에서 행복한 추억들을 다시 만들어 나간다면 다시금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난 아직 혼자가 아니기에.
4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낯익은 세상은 낯선 공기를 내뿜으며 나를 반겼다.
여전히 거대한 안구는 하늘에 드리웠고, 태양에서 뻗어 나오는 빛들을 어둡게 드리운다. 현실이 아니야, 내가 계속해서 목격하는 나를 흉내내는 그것처럼 그저 망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짓이야- 그렇게 치부해보려 노력했으나 거짓으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림자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듯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맞은편 도보 블록 위에는 내가 몇일 전 목격했던 두 남녀의 시신이 지독한 악취를 뿜어 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가진 채 나를 갈색 빛이 맴도는 눈으로 초점없이 나를 바라본다. 피부와 뼈만 남은 텅 빈 얼굴 속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들은 지독한 악취를 뿜어 대며 나를 악몽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끔찍한 광경으로 부터 고개를 돌리고 발을 떼려 다리에 힘을 꽉 주었지만 사방으로 흩뿌려진 그들의 혈흔은 이미 응고가 진행되었는지 찐득찐득 눌러 붙어 내 발바닥을 붙잡았다. 나는 다시금 힘을 주어 바닥에게서 달음 박질 쳤고, 발바닥의 가죽이 벗겨진 듯 심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릴 뿐.
나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악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어느새 내 눈에는 처음보는 낯선 풍경들이 여전히 낯선 공기와 함께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일까? 하는 의문도 잠시,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여전히 한곳을 응시하는 안구-그것이 바라보는 어딘가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듯 안구의 검은 눈동자가 얼핏 보인다.
나는 이유도, 의문도 없이 그 눈을 나침반 삼아 계속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계속해서 내 눈을 스쳐 지나가는 붉게 물든 거리, 그곳은 놀라울 만큼 어색한 동시에 묘하게 편안하다. 매일 같이 바라보던 비현실 속 또다른 나의 죽음들은 그렇게도 공포스러웠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들은 왠지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원초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 계속해서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이어진 고리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런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 내 몸은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고, 어느새 나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바로 나를 응시하는 안구, 다시금 그 검은 눈동자를 온전히 마주하는 그곳 - 나에게 행복한 추억이었던 동시에 지금은 악몽이 된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던 그 횡단보도였다. 넓은 횡단보도를 따라 보이는 새하얀 영화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익숙한 광경들에 나는 한동안 넋이 나간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막히는 정적을 깬 것은 지독한 악취였다. 죽은 형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지독한 악취, 그것이 다시 나의 코끝을 찌를 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뒤에서 무언가 질질 끄는 듯한 두 쌍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나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두개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죽음을 확인했던 두 남녀의 시신, 두 고깃덩어리들은 마치 살아 숨쉬듯 나를 향해 빠르게 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고개만큼은 꼿꼿하게 치켜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어둠속에 가려진 그들의 얼굴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두렵지 않다고 이야기 해주었던 나의 아버지, 언제나 나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나의 어머니를.
그들은 그때와 똑같이 따스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기어온 길에는 붓으로 칠한 듯 붉은 혈흔이 칠해져 있었고, 부서진 몸을 무리하게 이끌고 온 탓인지 날카롭게 부서진 새하얀 뼈가 피부 군데 군데를 삐죽삐죽 뚫고 나와있다. 나에게 하나 뿐인 희망, 그들의 끔찍한 결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그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하여 달음박질 쳤지만, 어느새 누군가가 내 손을 붙들었다.
‘형 이다.’ 보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오른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무언가 이상했다. 내 오른손에 잡힌 형의 손은 어떠한 힘도 쓰지 않은 채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었다. 마치 내가 그 손을 꼭 붙들기라도 한 듯이. 형은 마치 내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기이한 소리를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았으나 그 소리는 금새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경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마주하면 들었던 그 괴이한 경적소리가 잊혀졌을리가. 어느새 바라본 내 발 밑에는 형의 피로 물들었던 검붉은 횡단보도가 내려 앉았다.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린 나는, 우리를 치고 지나간 그 거대한 트럭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지만 난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손엔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치는 손이 계속해서 느껴졌으나, 공포에 몸이 굳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의 앞 창문은 점점 더 내 시야를 가득이 메워갔고, 창 밖의 두 형제를 선명하게 비췄다. 도망치려는 동생의 손을 꼭 붙든 채 가만히 서서 그것을 응시하는 나 자신을.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내가 붙들고 있는 작은 아이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동생의 눈 속에 비춰진 겁쟁이의 눈을. 그 날의 기억이 다시금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11월 11일
괜찮아? 흐릿한 시야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동생을 불렀다. 내 오른 손에 꽉 붙들린 동생의 손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로 물든 거리는 붉게 깜박거리고 있었고, 점차 시야는 선명해 졌다. 하지만 나는 꼭 붙들린 동생의 손을 보고 절망 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의 손은 손목아래가 모두 절단 된 채 빨갛게 물들어 거리를 붓처럼 칠하고 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두려워 동생의 작은 손을 부서질 듯 새게 붙들었다. 그때 바라본 동생의 눈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여 그 눈 속에 비춰진 스스로의 눈이 너무나도 저열하고 비겁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트럭을 바라보았고, 운전수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챈 듯 황급히 핸들을 틀어 내 옆을 스쳤다. 동생은 황급히 피하려고 몸을 던졌으나, 꼭 붙들린 손은 그것이 동생을 덮치고 나서도 내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하늘을 몇바퀴 구른 뒤 눈 앞에 떨어진 동생의 시신, 그 속의 눈은 나에게 말한다.
‘너가 죽인 거야.’
너가 날 죽인 거야.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나의 상상, 혹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눈에 비춰지는 환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내가 죽는 것이 마음 편했을 것이다. 내가 죽고 싶다, 아니 내가 죽었어야 했다. 찰나의 공포감을 견디지 못해 강하게 붙든 동생의 손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난 그보다 더 강하게 손을 잡았다. 그 당시 나는 생각했다. 나를 두고 가지마. 무서워. 누구보다 강인한 줄 착각했던 겁쟁이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남은 건 모멸감과 죄책감. 나의 존재가 경멸스럽고 또 경멸스러웠다. 커터칼을 집어 들고 손목을 서걱 서걱 그어 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세하게 생긴 틈으로 방울방울 흐르는 피를 보는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나는 칼을 붙든 손을 놓친다, 아니 놓는다. 나를 죽이고 싶지만 동시에 살고 싶다. 내가 자해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커터칼을 내 손목에 대는 것 만으로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완벽한 확신이 들어서 였을 것이다.
그렇게 죽은 동생의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해가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않고 회피하기 시작했다. 내 눈앞을 떠나지 않는 이것은 나야. 나는 나를 죽이는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쭉,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내가 살아가기 위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질적 용기가 없는 겁쟁이의 정신적 자해와 동시에 죄책감으로부터의 회피라는 것을.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부터의 기약 없는 도피라는 것을.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한번도 이런 하루를 바라며 잠에 들지 않았다. 어제가 내 남은 인생 중 가장 행복한 하루이길 바라지 않는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선명한 현실이 내가 생각하는 또다른 망상일 뿐이라고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뇐다. 하지만 붉게 물든 영화관의 커다란 창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그동안의 모든 현실들 보다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 나와 같이 동생이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 비춰진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부모님과 함께. 어머니, 아버지, 동생 그리고 나. 그 모습은 언뜻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가 다르다. ‘안구’. 그것은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던 거대한 안구와 똑같은 안구였다. 계속해서 나를 살기어린 눈으로 바라봤던 그것. 동생과 부모님은 나를 괴롭히던 그 눈을 한 채로 창 속에서 나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돌릴 수 없었다. 눈 앞의 창은 마치 할 이야기가 남은 듯,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곧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를 비추는 창문 속 세상, 그 너머의 세상을. 내가 살아가기 위해 택한 진실 너머의 또 다른 진실을. 다시금 가득 찬 설렘을 안고 올라탔던 차, 새하얀 표 세 장,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진짜 결말. 달려오는 트럭은 어느새 내 몸을 집어 삼켰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도망쳐온 세상은 흐릿해지고, 현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선명해진 세상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똑같은 안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경계 없이 밝게 빛나는 현실 속에서 또렷하게 내 눈을 비추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채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몸은 얼굴과 반대 방향으로 비틀려 있고, 남은 한쪽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움푹 파인 검은 자국만이 남아있다. 나는 다시금 가슴을 울리는 답답함을 느꼈으나, 이번엔 그것의 정체를 두 눈으로 또렷히 바라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갈비뼈가 시릴 정도로 나를 꽉 끌어 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엔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관통해 있었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 차의 내부엔 붉은 세상이 일렁인다. 어느새 내 마음을 설레이던 새하얀 표 세 장은 또 다시 붉게 물들었다. 소리쳐 외치고 싶다, 나를 구해 달라고. 누구든 좋으니 나를 여기서 꺼내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여전히 내 시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버지의 오른쪽 눈은 머리를 타고 흐르는 피에 붉게 충열 된 채 나를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다. 내가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물음이다. 나는 다시금 질문을 고쳐 잡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는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 듯 미약하게 붙어있는 숨을 붙잡은 채 나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비틀린 목에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오던 그 소리가. 아버지도 나를 괴롭게 만들고 싶은 걸까?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나를 응시하는 붉은 눈만이 선명해질 뿐이었다. 난 그곳에서 눈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을 비추는 세상은 눈부시게 밝고 평온하다. 고요한 도로 위 수많은 사람들, 강하게 내리 쬐는 태양. 얼핏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만 이내 그들은 관심을 뒤로 하고 떠났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그 느낌이 싫다.
그에 비해 창에 비치는 차 안의 세상은 붉게 물들어 있지만, 어딘가 편안하다.
그곳엔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동생이 있다.
창 속에서 보이는 가족들은 다시금 기이한 눈을 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나에게 환하게 웃어준다. 나는 그들에게 도와 달라 소리친다. 제발, 나를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꺼내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똑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계속해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만을 반복하고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마음을 내려 놓고 손을 뻗어 흐려지는 세상을 잡아 보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점점 흐려져간다.
'괜찮아?'
그 순간 흐릿해져가는 내 현실 속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다시금 시야를 또렷히 하고, 그곳을 바라봤다.
나 혼자 뿐인 텅 빈 창 속, 익숙한 듯 낯익은 사람이 보인다.
나에게 손을 뻗어오고 있다. 너무나도 기이했지만, 한없이 밝은 손.
세상은 가끔씩 나를 죽어가게도, 살아가게도 한다.
하지만 결국 모두 창 너머에 비치는 창 속의 세상, 나만이 보는 꿈.
거울 속 오늘보다 행복한 어제의 나.
누구도 나에게 손을 뻗지 않아.
나를 일으켜주지 않아.
괜찮냐는 그 작은 한마디 조차 들을 수 없겠지.
나는 텅 빈 창문을 뒤로 한 채,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날 차안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알 수 있는 사람도
더 이상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