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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나에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마음이 불안해질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 내 마음속에 심어져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기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뜬 나는 불규칙한 나뭇가지에 목이 관통된 채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그것의 초점 없는 눈을 마주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짧은 흑발, 오묘한 갈색 빛이 맴도는 눈, 햇빛에 약간 그을린 듯 붉은 빛을 띄는 피부- 몇 번을 봐도 영락없이 나와 똑같은 외모. 그것은 내 마음이 약해질수록 선명하게 스스로의 죽음을 마주보인다. 어느 날은 머리가 쪼개져 있는가 하면 어느 날엔 벽에 눌러 붙은 채 찌그러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현실보다 선명하게 내 눈에 비춰지는 그것을 바라볼 때에도 창문에 비춰지는 건 오직 나 자신 뿐. 그렇기에 나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 두 눈에 선명히 비춰지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지만 그 눈을 마주할 때조차 내 눈앞의 그것이 진정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유명한 미술 작품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어렸을 적 이름모를 유명한 미술가의 그림을 직접 본 경험만큼은 선명히 기억난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금 똑같은 미술품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 때와 사뭇 달랐다. 복제품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세월 동안 변한 나의 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동일 – 그 너머의 무언가 존재하는 걸지도.
확실한 것은 내가 느낀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금 눈 앞의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질감 역시 이와 비슷하다.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내 머릿속을 휘감는 극도의 괴리감,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감정.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와 거울처럼 똑같이 생긴 무언가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나는 차오르는 공포감에게서 멀어지고자 침대 옆 한 켠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내가 오래전에 사둔 낡은 자명종,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창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 거리의 사람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창 속에서 바라본 그 너머의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당장이라도 나와 밖을 가로 막는 낡은 문을 열어 제치고 그 세상을 마주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나는 형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도 쉽게 바스러진 형의 육신을.
사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워야만 할까? 누군가 내 몸을 꽉 붙잡은 듯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근심들은 갑작스럽게 문 밖에서 들려온 커다란 소음에 사라졌다.
아마 이웃들이 문 밖에 쌓아 둔 내 택배상자를 떨어뜨리며 낸 소리일 것이다. 나는 들이치는 짜증을 억누른 채, 무언가 망가질 만한 물건들은 없었는지 셈해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주문한 라면 몇 봉지, 망가져서 새로 산 핸드폰 충전기. 다행히 망가질 만한 물건은 없다. 마음이 한결 놓인 나는 언젠가부터 홀연히 밀려온 식욕을 느껴 어슬렁거리며 부엌의 찬장으로 향했다. 찬장을 열어보니 보이는 건 초라하게 남은 시리얼 한 봉지. 난 마지막 남은 시리얼 한봉지를 손에 쥐어 보았으나 텅 빈 봉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평소에도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지만, 오늘은 정말 최악이다.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찰나의 외출을 실행해야 하는 순간이 돌아온 것이다. 상자들을 모두 가지고 들어오는데 얼마나 걸릴까? 3초? 4초? 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도 나의 나약한 마음을 공포로 물들이기엔 충분하다. 또 다시 그것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미지의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나를 죽어가게 하는 상상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때마다 나에게 용기를 심어 주는 것 역시 나를 죽어가게 하는 상상들이다.
뭐든 죽음보단 못하리, 두렵다고 문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할 수 없다. 결심이 선 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뒤로 한 채 오랜 시간 굳게 잠겨 있던 문을 열어 또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문 밖에서 나를 응시하는 누군가와 함께.
그는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새빨간 상의와 하의. 허나 목 위로 머리가 있어야할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것을 쳐다볼 용기도 없이 눈을 감은 채 속으로 되뇌였다. ‘이건 상상이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눈을 뜨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몇 번을 더 되뇌였을까, 나는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더욱 넓어진 나의 시야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시선을 보여주었다. 그것의 머리는 혀를 길게 내민 채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미 숨이 다한 듯 두 눈은 총기를 잃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분명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 눈을 감을 수도 없이 그것을 바라보며 공포에 잠식당했다. 듣고 싶다, 괜찮냐는 한마디를. 끊임없이 빌었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 주기를.
이런 상황이 올 때면 나의 기억속에서 한 사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또래에 비해 허약한데 다가 소심하기까지 했던 나는 매일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켜주던 형. 그는 늘 자신감이 넘쳤고,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본적이 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마치 동생의 건강을 모두 가져가기라도 한 듯이.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는 항상 말하곤 했다.
‘괜찮아.’ 그 별거 아닌 말이 너무나도 힘이 되어 마치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과의 추억을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내 머릿속을 가득히 메웠던 공포는 자리를 내주고, 나를 괴롭히는 그것 역시 사라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가지 문제가 더 생겼다.
‘ㄲ…..끼....깨..에……어…’
나는 반사적으로 방안으로 고개를 돌려 그 기이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고, 뼈 채로 다져진 듯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내 방 창문 앞에서부터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활짝 열린 문 밖의 세상을 향한 공포가 투명한 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눈치 없는 눈동자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서서히 다가오는 고깃덩어리를 계속해서 비추었다. 그것은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씩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의 두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은 얼굴의 형체를 한 무언가를 내밀고 나와 눈을 마주치듯 멈췄다. 움푹 파인 두개의 구멍과 붉은 살결 틈새로 보이는 하얀 두개골, 자세히 볼수록 영락없는 사람의 형상이다. 그렇게 그것과 얼마나 더 원치 않은 눈맞춤을 지속하였을까, 이 숨막히는 정적 속 나를 구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자명종 소리였다.
자명종은 따르릉 소리를 내며 아침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 다행히도 나를 붙잡고 있던 무언가 사라진 듯 몸이 움직여졌다.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던 나의 몸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뒤로 자빠졌지만 다행히 침대위로 안착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분명 난 비현실속에 살고 있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그것’ 만큼은 현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저 떠올리려 하지 않았을 뿐, 그 고깃덩어리의 정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오늘 같이 형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죽은 형이 날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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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꽤 재밌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 그 속에서 살아 숨쉬며 주인공들이 느끼는 극단적인 비극과 갈등, 그리고 기쁨과 환희를 체험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시간이 점점 흐른 뒤에 얼핏 그 속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과 달리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사건들의 연속,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선망하는 주인공들과 함께하며 그 경험들을 함께하는 ‘나’ 는 내가 아니었다.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을 바라보듯이 그저 목격할 뿐, 자각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진짜 ‘나’ 는 그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꿈과 현실의 경계속에 떠다녔을까, 나는 지진 같은 거대한 흔들림과 함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 이러다 늦겠어!” 흐릿한 시야속에서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머릿속엔 거짓된 환상들이 빠져나가고 다시금 현실의 기억들로 채워졌다.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늦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평소 검은 옷을 좋아하는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장롱에 걸린 검은색 상의와 하의를 집어 들고 침대에 집어 던진 뒤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를 하는 동시에 이빨을 닦았다. 몸을 모두 씻은 나는 침대로 향해 널 부러진 옷가지를 주워 입은 뒤 방 한구석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8시, 영화 시간은 이미 임박해오고 있었다.
영화 시간에 늦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겠지만 우리 형제에게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꽤 소중한 추억이다. 우리는 이따금씩 tv에서 새로운 영화가 상영한다는 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설레었다.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또 무슨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돌이켜보니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기 보다는 영화관에 가는 그 분위기와 추억들을 사랑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달가운 것은 아니다. 나는 점점 시시한 내용의 만화영화를 보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고 어젯밤엔 우리가 오늘 보기로 한 만화영화의 내용이 유치하다는 생각에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막상 영화관으로 향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시큰거리며 설레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손을 맞잡고 끝없이 펼쳐진 보도 블록 위를 빠른 걸음으로 내딛었다. 한발, 두발, 그렇게 하염없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광경이 횡단보도 맞은편에 들어왔다. 우린 항상 이곳을 지나 영화관에 도착했고, 그때마다 익숙한 듯 새로운 설렘이 가슴 한 켠에서 피어났다. 새하얀 영화관의 창문은 통유리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즐거워 보여 항상 맞은편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설레는 기분이 배가 되곤 했다. 눈 앞에 광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신호등은 초록색 빛을 띄우며 빛나기 시작했고, 우린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달음 박 치기 시작했다, 새하얀 영화관을 향해.
늘 똑 같은 감정을 품고 수십번도 넘게 지나온 익숙한 횡단보도, 하지만 그 감정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을 없었다. 마침 그 날 그 시간에 그 곳을 지나던 트럭 운전수는 우연히 대낮부터 술에 찌들어 있었고, 그 한번의 변화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죽음이 우리의 눈앞을 선명하게 지나던 그 순간, 형은 죽음을 직감한 듯 손을 강하게 움켜 쥐었다. 시속 150km로 달리던 1.5톤가량의 쇳덩이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챈 듯 흔들거렸고, 그것의 앞 창문은 손을 꼭 쥔 채 그것의 커다란 창을 응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속에는 동생이 보였다. 형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속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우리는 이상하게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왜 일까? 그 때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겠구나.’
이내 트럭은 우리를 그대로 들이 받아버렸고,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정신을 차린 나는 흐려진 시야 속에서 내 오른손에 꼭 붙들린 왼손을 보았다. 다행이구나,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내 시야는 점점 밝아지며 진짜 현실을 보여주었다. 형의 오른 팔은 날라가 반대편 신호등에 걸려 있었고, 왼쪽 종아리는 트럭의 앞 범퍼에 끼어 달랑달랑 흔들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얼굴에선 안구가 하나 튀어나와 데구르르, 내 눈앞에 굴러오고 있었고, 나에게 매일 웃어 주었던 그 찌그러진 고깃덩어리의 입에선 마치 바람이 새는 듯 한 끔찍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바로 ‘눈’ 이었다. 텅 빈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눈은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 나의 눈 앞에서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릴 수도 없이 영원히 감기지 않는 형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광경 너머에 보이는 영화관의 커다랗고 네모난 유리 창 속 우리와는 다르게, 그 너머의 세상 속 사람들은 우리와 동 떨어진 듯 행복해 보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묘한 이질감과 낯선 바람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문득 내가 문을 아직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뒤에선 밖에서부터 다가온 서늘한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지독하게 어두운 방안을 비추는 밝은 형광등을 불빛도 멈칫멈칫 새어 나오고 있다. 밖과 단절되었다는 착각에서 온 묘한 안정감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어느새 밖과 연결 되어있다는 사실에서 온 공포감이 내 머릿속을 휘감았다.
나는 나를 죽어가게 하는 이 감정이 나를 통째로 집어 삼키기 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몸을 벽에 기대어 일으켜 세웠다. 밖에서 들려오는 변칙적인 소음들은 여전히 내 뒤통수를 시큼시큼 찔렀고 내 마음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직 아무런 환상도 보이지 않았기에 난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곳으로 달려가 문을 있는 힘껏 잡아 당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죽어가게 하는 바깥의 세상은 다시금 나와 분리되었고, 그 순간 문 밖의 조명에 감춰진 어둠이 내 방에 드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안에선 오래된 디지털 시계의 작은 화면만이 낮 12시를 가리키며 방안에서 깜박거리며 방안을 드문드문 비추었다. 아무리 밖과 단절된 나의 방안이라지만, 확실히 칠흑 같은 어둠속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자아낸다. 깜박거리며 내 눈에 비추는 방안에 혹시 다른 무언가 있지는 않을까? 나의 머리는 또 다시 공포스러운 망상을 끊임없이 자아내고 있다.
나는 다시 그 공포스러운 환상들을 보고 싶지 않기에 어두운 방안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창문을 막고 있는 붉은색 커튼의 앞으로 향했다. 문득 칙칙한 무채색을 좋아하는 내가 왜 이런 소름 끼치는 핏빛 커튼을 달아 놓았는지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하늘거리는 그 커튼을 열어 제치고 환한 태양이 떠있을 세상을 창문에 비추었다. 하지만 창문 너머에 비춰진 세상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